AMD, 듀얼 피지 탑재한 '라데온 프로 듀오' 발표

AMD가 단일 기판에 Fiji GPU를 두 개 탑재한 '라데온 프로 듀오' 그래픽카드를 금일 오전 9시에 공식 발표했다. 코드네임 제미니로 알려졌던 이 제품은 통상적으로 라데온 브랜드가 겨냥해 온 컨슈머 게이밍 시장보다도 VR 컨텐츠 생산, 즉 부분적으로 전문가 시장을 겨냥한 것이 특징이다. 이 대목에서, 라데온 프로 듀오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AMD의 게이밍 그래픽카드 브랜드인 라데온과 전문가용 브랜드 파이어프로(FirePro)가 결합된 것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라데온 프로 듀오는 전문가용 그래픽카드로서는 최초로 Fiji GPU가 적용된 제품이며, 최초로 HBM을 탑재한 것이기도 하다. 연산 성능은 당초 VRLA에서 알려졌던 12 테라플롭스보다 무려 30% 이상 상향된 16 테라플롭스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쿨링 방식으로는 라데온 R9 Fury X 류의 '폐쇄형 수랭식 쿨링 솔루션'(closed-loop liquid cooling solution)을 채택, 최근 몇달간 '제미니'의 사진이라 향간에 떠돌던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에 관해 IYD에서는 미리 이를 지적한 바 있었다(링크).

(위 : 라데온 프로 듀오의 기판 사진 / 아래 : '코드네임 제미니' 프로토타입 기판 사진)

AMD는 이미 듀얼 Fiji를 탑재한 기판을 작년 6월부터 틈날 때마다 공개해온 바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코드네임 제미니'는 2015년 연말 시즌을 겨냥해 출시될 것이 유력해 보였으나 VR 헤드마운트 장비와의 연계가 결정되고 VR 생태계의 도입 자체가 다소 지연되며 제미니의 등장 역시 오늘로 미뤄지게 되었다. 로드맵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제미니를 VR과 연계시키려 했던 진의를 알 수는 없으나, 앞서 이 글(링크)에서 지적한 바 있는 '최신 게임 타이틀일수록 멀티 GPU 효율이 나빠지는' 문제와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최신 그래픽 효과의 구현을 위해 애용되는 '템포럴 리프로젝션' 기법의 원리 자체가 크로스파이어 / SLI의 기본 원리인 '교대 프레임 렌더링'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최적화 정도나 개발사의 노력여하를 떠나 최신 그래픽 효과를 지원하는 게임은 원리적으로 멀티 GPU 지원이 취약하다. 이러한 상황에 예년과 같은 '듀얼 GPU 게이밍 그래픽카드'를 출시하는 것은 철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일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우리 주변에 VR 생태계가 조성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든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 Vive가 예판에 돌입했고 스팀VR이 자체적인 '인덱스'를 발표한 이 시기에 라데온 프로 듀오가 출시된 것이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권장 소비자가(세전)는 1499달러로 한 세대 전의 라데온 R9 295X2와 같다. 당시 이 제품은 경쟁 상대였던 엔비디아의 지포스 GTX 타이탄 Z가 엄청나게 비싼 가격(2999달러)으로 책정된 것과 대비되며 상대적으로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는데,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은 이유로 현 세대 엔비디아의 라인업에는 듀얼 GPU 그래픽카드가 없다. 경쟁구도를 형성할 라이벌 없이 홀로 등장한 라데온 프로 듀오의 흥행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 중 하나다.

공식적으로 AMD는 이 제품이 16 테라플롭스의 연산성능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단정밀도 기준으로, 통상적인 파이어프로 라인업처럼 배정밀도 연산성능이 봉인해제되어 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론상 Fiji GPU는 단정밀도 연산성능의 1/4에 해당하는 배정밀도 연산을 수행할 수 있으나 컨슈머 라인업에서 이 수치는 1/16으로 축소되어 있다. 한편, 16 테라플롭스를 구현해 낸 조합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두 개의 Fiji GPU마다 4096개씩의 스트림프로세서가 탑재되고 이들이 1GHz로 작동하는 것인데, 라데온 R9 Fury처럼 3584개씩의 스트림프로세서를 탑재한 Fiji GPU 컷다운 버전 두 개가 1.14GHz로 작동해 16 테라플롭스를 채웠으리라는 상상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코어 일부를 비활성화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클럭을 높이는 것 중 후자의 소비전력 증가폭이 훨씬 크기에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당초 알려진 12 테라플롭스가 아닌 16 테라플롭스라는 것이다.

한편, 오늘 공개된 이미지 중 가장 첨예한 관심을 끄는 것은 3개의 보조전원 커넥터일 것이다. 산술적으로 3개의 8핀 보조전원을 통해(+PCI-Express 슬롯 자체에서 얻는 전력 포함) 최대 525W의 전원 공급이 가능하며, 전작인 라데온 R9 295X2가 꼭 그만큼의 TDP를 가졌던 전례가 있다. 이는 AMD가 그간 수 차례 언급한 "제미니는 375W의 TDP를 갖는다"는 사실과 배치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다. 하나는 375W라는 수치가 VRLA에서 언급된 12 테라플롭스 성능이 기준일 때 매겨졌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실제로(8핀 보조전원 3개를 꽂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데온 프로 듀오의 TDP는 375W에 머물러 있다는 것. 후자의 경우, 175W TDP 천장을 준수하기 위해 상당한 쓰로틀링을 감수해야 했던 라데온 R9 나노와 비슷한 동작특성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싱글팬 공랭식 쿨링 솔루션의 탑재로 발열 해소에 제약이 뚜렷했던 나노와 달리, 라데온 프로 듀오는 R9 Fury X와 동일한 수랭식 쿨링 솔루션을 갖춘 점 등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쓰로틀링 없이 무지막지한 TDP를 갖는 편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AMD의 폴라리스와 엔비디아의 파스칼 모두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라데온 프로 듀오가 왕좌에 무혈입성할 것이란 점에는 이견의 여지조차 없다. 관건은 왕좌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킬 수 있느냐가 될 것인데,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유저들은 벌써 4년을 끌어 온 28nm GPU 시대에 슬슬 지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양사의 분발을 빌며, 오는 4월 GTC에서 엔비디아가 어떤 멋지고 신선한 소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킬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