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西皆反, 此亦天亡秦之時也. 吾聞先卽制人, 後則爲人所制. 吾欲發兵, 使公及桓楚將

<史記> - 券七 項羽本紀

강서가 모두 모반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진나라가 망할 때임을 알려주는 것이오. 내가 듣기로 선수를 잡으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 후수가 된다면 남에게 제압당한다 하였소. 나는 병사를 일으켜, 공과 환초를 장수로 삼고 싶소. - 사기, 항우본기

초한쟁패를 다룬 장기판은 언제나 양강의 대립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래픽 카드, 정확히 말하면 외장 GPU 제조사는 양강구도입니다. 절묘하게 장기판 속 초한 진영의 색깔도 초록색 빨간색이라 엔당과 암당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그래픽카드 장기판에선 초나라가 지금껏 계속 이기고 있고, 이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처럼 보이지만요.

지난 GDC에서 기대와 달리 AMD는 베가의 정확한 윤곽을 공개하지 않고, 후원하는 소프트웨어, 게임에 대한 소개위주로 발표를 했습니다. 이에 비해 엔비디아는 예상했던 대로 1080Ti의 성능과 가격을 공개했죠. 

(출처 : http://drmola.com/pc_column/140781)

예상되는 성능은 1080의 120~135% 수준으로 박스에서 꺼내자 마자 타이탄 X를 앞선다고 합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3DMark Fire Strike Graphics Score 지표로는 순정 27K~오버 31K 정도까지 나올 것 같네요. 

(출처 : https://videocardz.com/67004/first-overclocked-geforce-gtx-1080-ti-3dmark-benchmarks-leaked )

사실 성능은 별론으로 하고, 1080Ti는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GTX 970 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AMD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래쪽의 ①은 잃어버린 부분입니다. 왼쪽의 블록다이어그램에서 하얀 부분과 좌측의 메모리 컨트롤러가 그 부분입니다. L2캐시, 래스터 엔진, 메모리 컨트롤러를 각각 1/12 만큼씩 잃어버렸습니다.이를 보면 GTX 970과 유사합니다. GTX 970은 이와 똑같은 부분을 1/8씩 잃어버렸습니다. 다만 1080Ti는 굳이 12GB VRAM을 유지하지 않고 11GB로 메모리 칩까지 하나 덜 달았으나, GTX 970은 대응되는 메모리 컨트롤러가 없는 데 램칩을 하나 더 넣어놔서 3.5GB + 0.5GB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위쪽의 ②는 타이탄 XP에 비교해서 오롯하게 남아있는 부분입니다. 어차피 타이탄XP 자체가 컷다운된 버전이긴 합니다만, 이 부분들을 비활성화 하여 하위 라인업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니 만큼 굉장히 독특합니다. 남겨둔 이유는 AMD에 대응하기 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엔비디아는 상대적으로 ②가 약하고 ①(중에서도 ROP성능)이 강한데, 이를 뒤집어 놓은 셈입니다.

*비레퍼의 평균 부스트 수준이 강력해 실제 연산성능은 더 높다. 실제론 거의 대부분 7TFLops 이상.

일반적으로 해상도가 높아지거나 연산 부하량이 많아질수록 (옵션을 강하게 걸수록)  ① 보다는 ②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요컨대 순수 연산성능이 강력해야 유리하죠. 그간 AMD 카드는 동급, 동세대 엔비디아보다 연산성능 자체는 상당히 더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1080Ti는 조금 다릅니다. 플래그쉽 베가의 레퍼런스 FP32 연산성능이 12.5TFlops로 예상되는 가운데, 11.3TFlops인 1080Ti는 거의 턱밑(90.8%) 까지 쫓아온 셈입니다. 파스칼 비레퍼의 부스트 폭이 좋은 편이므로 서로 부스트된 상태에선 베가와 비슷해질 수도 있습니다. 베가가 어찌 나오든 성능상 열세에 놓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출시되고 있는 파스칼 세대를 보면 상대보다 강력한 카드를 상대보다 빨리 내놓는 식으로 엔비디아는 늘 선수를 점하고 있습니다. 경쟁 상대가 있는 메인스트림, 엔트리 레벨 카드는 상대적으로 늦게 출시해 당해 줬지만, 경쟁 상대가 없는 상위 시장을 혼자서 독점하고 있지요. 덕분에 그 1년간 마음놓고 GP104 1080과 1070을 비싸게 받아서 이윤을 더 낼 수 있었습니다.

요번에 출시되는 GP102 지포스 1080Ti 으로도 선공권을 쥐고 있는 셈입니다. $699에 이런 카드를 내놨으니 너네 베가는 알아서 해라는 식이죠. 물론 속마음으론 더 받고 싶을수도 있겠지만, GP104처럼 경쟁사의 대응 없이 무주공산인 왕좌를 1년간 지키진 못할테니 똥배짱은 못 부린 듯 합니다. 베가는 좋으나 싫으나 이 기준선에 맞춰서 가격과 성능을 내야겠죠. 

하지만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맨 위의 저 말을 한 당사자는 항우가 아닙니다. 저 말을 한 당사자 은통은 저 말을 한 다음 항우의 칼에 죽고 말죠. 저런 말을 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도 정작 내가 선수를 잡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느 쪽이 앞으로 선수를 잡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