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대교체기가 아닌 때 최상위 라인업이 리뉴얼되는 것은 퍽 익숙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숨죽여 파스칼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엔비디아는 꼭 작년 이맘때 출시한 자사의 최고가 전문가용 그래픽카드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불어넣었다. 쿼드로 M6000의 VRAM을 12GB에서 24GB로 증설한 것이다. 기존 모델은 즉시 단종되며, 24GB 버전은 그대로 12GB 버전이 있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이례적인 러닝 체인지이다.

쿼드로 M6000이 전격적으로 리뉴얼된 것에 두 가지 관측이 제기된다. 하나는 현업에서 12GB라는 VRAM 용량이 더 이상 충분치 않아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VRAM 증설에 대한 건의가 있어 온 결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쿼드로 M6000이 '향후 상당 기간' 현역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모종의 이유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플래그십 제품을 출격시키며 엔비디아가 그 정도의 미래 추계를 하지 않았을 리 없는 만큼, VRAM 요구량 증가 추세를 잘못 예상해 12GB로는 부족해지게 되었다는 예상보다는 그들이 최초 상정한 기간 -아마도 1년- 보다 더 오랜 기간, 쿼드로 M6000을 현역 플래그십으로 묶어 둘 이유가 최근 들어 '생겨났다는' 가정에 더 무게가 실린다. 간단히 말해, 이번 리뉴얼이 파스칼이 예상보다 늦어진다는 정황증거란 얘기다. 정상적인 세대교체 사이클에서라면 새로 투입된 리프레시 버전이 과연 몇 달이나 왕좌를 지킬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이 는 사실 HBM2 메모리의 향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단 둘뿐인 HBM2 메모리의 생산처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3분기부터 양산을 개시할 것이라 밝힌 바 있으며, 따라서 적어도 올 연말 이전에는 AMD와 엔비디아 어느 쪽에서도 HBM2를 탑재한 그래픽카드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이미 AMD는 지난주 GDC에서 2017년의 '베가'에서나 HBM2를 탑재하게 될 것임을 시인한 바 있다. 엔비디아측에서 최근 전해지는 소식 역시, 일제히 '파스칼 선발대'는 GDDR5 또는 GDDR5X를 탑재하리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쿼드로 M6000은 파스칼 플래그십의 출시가 늦어짐에 따라 예정보다 오랜 기간 플래그십의 자리를 지킬 필요가 생겼고, 반면 '작년의 기준'에 따라 탑재된 12GB의 VRAM이 불과 일년 새 업계의 추세에 따라잡힐 위기에 처했기에 '맞춤형 처방'을 실시한 것이 이번의 리뉴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무엇보다, 매 세대교체기마다 새로운 GPU를 가장 빠르게 적용해 온 영역이 바로 쿼드로로 대표되는 전문가용 그래픽카드 시장이었음을 생각하면 바로 이 영역에서 구세대 대표 쿼드로 M6000이 장기집권할 태세에 돌입했다는 소식은 결코 게이머들과 무관할 수 없다. 엔비디아가 탑-다운 방식의 GPU 적용을 고수하는 한 게임용 파스칼의 등장은 더욱 요원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이번 쿼드로 M6000 리뉴얼은 경쟁사 AMD의 '라데온 프로 듀오' 발표(링크) 와 마치 데자뷰같은 인상마저 풍긴다. 양사 모두 현세대 GPU를 출시한 지 일년여가 되어 가는 이 시점에, 이제 와서 그에 기반한 최상위 라인업을 재정비하는 것 자체가 차세대 GPU 일정의 순연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1Xnm 스케일로 제조공정이 미세화되며 제품 출시일정에 차질을 겪은 곳이 이들뿐이 아니라면 위안이 될까. 인텔 역시 브로드웰의 출시가 일년 가까이 미뤄지는 파행을 겪으며 결국 스카이레이크를 끝으로 '틱톡' 전략을 폐기한 바 있는데(링크), 이들의 첫 1Xnm 제조공정이던 14nm 핀펫이 2014년에 도입되어 2년여에 걸쳐 최대 400mm2급의 큰 칩에까지 적용되는 경험을 쌓은 것과 대조적으로 AMD와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생산에 각각 적용되는 삼성/글로벌파운드리의 14nm 핀펫 공정과 TSMC의 16nm 핀펫 공정은 최근에야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으며, 이들로써 생산해 본 가장 큰 칩이라봐야 애플 A9의 100mm2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부디 파운드리가 GPU 세대교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니길 바라 본다.